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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노래를 부르는 자(요한계시록 14:1-7)
고영수 2020-05-10 추천 0 댓글 0 조회 496
[성경본문] 요한계시록14:1-7 개역개정

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2.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데 내가 들은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이 그 거문고를 타는 것 같더라

3.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4.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5.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6.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

7.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새 노래를 부르는 자(요한계시록 14:1-7/2012.8.5.오후)

1. 요한계시록의 내용에서 나오는 숫자 중에 666과 더불어 144,000의 숫자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거리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이단인 여호와의 증인의 경우에는 자신들만이 이 숫자에 포함될 것이라고 말하고, 월드 와이드 교회는 헌금을 많이 바치면 이 숫자에 들어갈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대환란을 통과한 후에 구원받을 유대인들의 숫자가 144,000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어려운 부분들을 가지고 자기들 마음대로 해석하는 오류에 빠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내용은 666은 짐승의 숫자 즉 적그리스도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숫자이고, 144,000인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숫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잘못된 가르침에 빠져 영혼이 방황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가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속속들이 잘 모른다고 해서 구원이 취소되거나 신앙생활에 큰 지장을 주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많이 아는 학자들조차도 천년왕국에 대해 전 천년설이니 후 천년설이니 하면서 의견이 나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시온산에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구원받은 144,000인이 서서 하나님을 향하여 새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144,000인이라는 숫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과 더불어 시온산에 올라 구원의 새 노래를 부를 자가 누구인가 하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2. 첫째로,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거룩한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함께 기록된 사람들이라 했습니다.
과연 그들의 이마에 기록된 이름, 그 인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실제적으로 예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을 작은 이마에 기록하려면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글자만 따서 기록하면 좀 간단하리라 생각합니다마는 과연 문자 그대로 우리가 해석을 해야만 합니까?
짐승의 인을 이마와 오른손에 받는 다는 부분에서도 사람들은 문자대로 해석하고 생각하지 않고 바코드나 벨리 칩을 이식한다는 등의 상상을 동원하듯이 이 부분도 문자대로 해석한다면 말씀의 본질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온산에 어린양과 함께 서 있는 이 사람들의 받은 인은 무엇입니까?
본문 4-5절을 근거로 생각해 볼 때 이 인이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그 고백한 신앙대로 살기 위해 당하는 많은 고난의 자국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이라고 하면 짐승이나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물건에도 있고, 심지어 우리 예수님에게도 그 인은 남아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해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생긴 영원한 사랑의 자국이 있습니다.
그 인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죽기까지 사랑하셨던 인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 사랑의 인이 하나님께 가장 아름답고 거룩한 제사의 제물의 증거가 되었고, 그 결과 그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이러한 인이 없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3. 세상 사람들이 받는 짐승의 인은 무엇입니까?
자기 사랑의 인이요 육체의 인이요 하나님과 원수된 인이요 그리스도의 사랑을 거부한 심판의 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받은 이 인은 구속함을 받은 자의 인이요, 영원한 생명의 보증이요, 끝까지 주님을 사랑한 증거의 인인 줄 믿습니다.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자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갈6:17) 다는 것입니다.
이 흔적이 무엇입니까?
본문 1절에서「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의 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로 삶의 방향을 바꾸고 십자가의 복음을 위해 걸어간 그의 남은 여정이 곧 자신의 몸에 새겨진 예수의 인이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자신의 몸에 새겨진 예수의 인에 대하여 고후11:23-29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 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행으로 말미암은 강과 시내와 광야와 바다의 위험과 강도와 동족과 이방인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하면서 그 외에서 수도 없는 고난과 위험과 괴로움을 말했는데 이것이 다 무엇입니까?
어린양과 함께 시온산에 서서 구원의 새노래를 부르는 자들의 이마에 새겨진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인이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사랑으로 복음을 위하여 종노릇하게 한 것입니다(갈5:13).

4. 그렇다면 시온산에 어린양과 함께 서 있는 이 144,000인들의 이마에 새겨진 인은 과연 어떤 인을 말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 나타난 대로 살펴보면, 첫째로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4)고 했습니다.
이것은 세간에 남녀의 부적절한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서 우상숭배를 거절한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치 일제 36년 동안 한국 교회가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함으로 환란과 순교를 당했듯이, 북한의 공산당들이 교회의 씨를 말리고 신자들을 죽음으로 몰아갈 때 일사각오를 가지고 신앙을 사수하던 순교자들의 신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던지 따라 가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두려움이 없는 충성된 신앙을 말합니다.
삶의 환경과 조건이 어떻게 변하든지 관계없이 주님과 더불어 늘 신령한 교제를 나누면서 내일이라고 하는 미래를 전부 주님께 맡기고 의지하는 신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큰 풍랑이 이 배를 위협하며 저 깊은 물 입벌려 달려드나 이 바다에 노저어 항해하는 주 예수님 이배의 사공이라, 나 두렴 없네 두렴 없도다 주 예수님 늘 깨어 계시도다 이 흉흉한 바다를 다 지나면 저 소망의 나라에 이르리라」(462장)
어린양이 인도하는 대로 어디든지 따라간다는 것은 환경과 조건에 흔들리지 아니하는 온전한 순종을 말합니다.

5. 셋째는,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시온산에 선 이 144,000인이 완전한 하나님의 소유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전 생애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드렸기 때문에 그 누구도 감히 손을 댈 수 없는 하나님 자신만의 완전한 소유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린양과 더불어 거룩한 시온산에 서서 구속함의 새 노래를 부를 자는 하나님의 소유로 인 맞지 아니한 자는 이 새 노래를 부를 자격이 없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들이 부르는 새 노래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최신 곡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대를 따라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만들어진 그런 새 노래가 아니라, 노래를 부르는 이 사람들이 구속함을 받아 거룩한 새사람이 되어서 부르는 노래를 새 노래 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6. 넷째는, 5절에 있는 말씀으로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라 했습니다.
이것은 구속함을 입은 사람들이 믿고 바라보고 따르는 자신들의 영원한 표상인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인격을 입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랑하는 학문이나 인격이나 교양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입혀 주시는 의의 거룩함에 비하면 더러운 걸레만도 못한 것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의 더러운 생각과 악한 행위들이 살인을 부르고 분쟁을 일으키며 온갖 악행으로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 분의 피로 구속함을 입지 아니했다면 얼마나 불쌍한 존재가 되었겠습니까?
정말 이 사간에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 분의 은혜에 감사하고 있습니까?
용기 있는 자는 예라고 할 것입니다. 양심이 있는 자는 머뭇거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분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롬5:8)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에 감격하여 그 분의 사랑에 이끌린 것 뿐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요 그 분의 사랑도 선물입니다.
또한 우리가 의롭고 거룩함에 이른 것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이 우리의 입에서 거짓말을 제하고 대신 감사의 찬양으로 넘치게 하였습니다.
이 선물이 우리를 영원한 의인으로 인정받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은혜, 이런 귀한 선물을 받지 아니하고는 그 누구도 어린 양과 더불어 시온산에 설 수 없으며, 그 누구도 구속함의 새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입술의 찬양과 감사는 장차 주님과 더불어 하나님 앞에서 부를 영원한 새 노래를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7.마지막으로, 시온산이란 성경적으로 보면 완전한 구원과 성도들의 최종적인 승리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12:17절에 보면 짐승이 선 곳은 바닷가의 모래 위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운명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마태7:26-27절의 말씀과 같습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그러나 144,000인이 선 곳은 구원과 승리가 영원히 보장된 거룩한 시온산입니다.
앞으로 어떤 환란과 핍박이 온다고 하여도 결코 두려워 할 이유가 없는 것은 이미 우리들은 구속함을 입은 144,000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 곳은 바닷가의 모래가 아니라 거룩한 시온산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영적 싸움의 최종적인 승리는 어린양에게 있고, 그것은 곧 우리의 승리를 의미하는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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