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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귀한 것(고린도전서13:11-13)
고영수 2023-03-25 추천 0 댓글 0 조회 299
[성경본문] 고린도전서13:11-13 개역개정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제일 귀한 것(고린도전서13:11-13/2023.3.26.오전)

 

1. 하라다 다까시(原田隆史)는 나라 교육대학을 나와 오사카의 체육교사로 부임한 곳이 학생수 1,600명의 최대 맘모스 중학교였습니다. 학생들의 복장 불량은 물론이고 교내에 담배꽁초가 널려 있고, 3층에서 교실 의자가 날아와 죽을뻔한 일도 있었습니다. 부임한 지 3년째였던 25살 때, 학생 하나가 집에서 잠자던 중에 그 부모에게 살해를 당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원인은 집안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견디다 못한 그 부모가 잠자는 자식을 죽인 것입니다.

각종 메스컴이 대대적으로 보도를 하면서, 학교는 도대체 이런 일이 일어나기까지 무엇을 했느냐고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학교는 매일 지옥과 같았고, 마침내 하라다의 머리털이 빠지기 시작했고, 집에 돌아와서 모친에게 학교를 쉬겠다고 했더니, 모친은 검은 매직펜을 가지고 와서 하라다의 머리카락이 빠진 곳에 칠을 하기 시작했고, 깜짝 놀라서 모친을 쳐다보았더니 울고 계셨습니다.

어머니는 하라다에게 네가 교사를 그만둘 생각인 거지? 잘 들어! 힘들고 어렵다고 직업을 바꾸면 그곳에 무슨 미래가 있겠느냐, 아니잖아, 너 자신을 바꿔야 해! 자신을 바꾸지 않는 한, 어떤 직업을 가져도 결과는 마찬가지야!

평소에는 항상 마더 테레사 같이 온유했던 그런 모친의 고함 소리에 정신이 번득 들었다고 합니다.

하라다는 말하기를, 사람이 힘들고 어렵다고 부드러운 말로 달래주는 것으로는 사람을 성장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확실하고 진정성 있는 대화야말로 사람을 사람답게 키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라다는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의 교사 경험을 살려서 나중에 하라다교육연수원를 세워 공립학교의 교육을 개혁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는데, 이 방면에서는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으로 소문이 나 있다고 합니다.

인생에서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로 부터 도망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참으면서 그 문제를 애써 무시하고 그때마다 임기응변으로 넘어가는 사람이 있고, 그 문제를 향해 정면으로 부딪쳐 나가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2. 우리 기독교 신앙의 현상을 보면, 신앙인이라면서 십자가의 능력을 모르거나 믿지 않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 사건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머리로만 이해하고 그 사건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려고 하지 않고 관심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20)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에서 산다는 말이 네 번이나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잠깐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원히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을 나와 관계된 사건으로 받아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교회가 시끄럽고 세상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예수님 처럼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을 박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마음이 약해서 좀처럼 죽이는 일을 못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한 알의 밀알처럼, 자신을 죽이지 않고는 다시 살 수 없으며, 자신을 십자가에 못을 박지 않고는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능력은 나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시작되는 것입니다.

열심히 몸부림쳐도 살아가기 어려운 세상인데 왜 우리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까?

여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을"(6:6-7)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문제가 많은 것은, 교회 자체가 아니라 그 교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좀처럼 죽지 않고, 죽다가 말았거나, 아니면 죽은 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내가 어렸을 때에" 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언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예수 믿고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안에는 그리스도 이외에 세상의 온갖 것으로 가득차 있을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우상과 욕심과 혈기와 교만, 질투와 음란이 가득차서 혈기왕성하게 살아갈 때입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할 줄 모르고 계속해서 미워하면서 살아갈 때입니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계속해서 화를 내면서 살아갈 때입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이 변화되어 남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욕심을 내면서 살아갈 때입니다.

이런 삶은 십자가를 지는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신 이유도 모르고 그 사건이 가슴에 와 닿지 않습니다.

그러니 십자가와는 상관이 없이 내 마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 죄를 위해 아들을 화목제물로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주셨는데, 우리는 깨닫지 못하고 나의 나된 것이 전부 내 능력이고 내 자랑이고 조상을 잘 만난 덕분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의미를 모르고, 자신만을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장성한 사람은 어떻습니까? 주님 안에서 믿음, 소망,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자입니다.

 

4. 예수님도 이 세상에 오실 때에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과 고난이 있었습니다. 14:32-42절을 보면, 그분이 얼마나 아프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33-34절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왜 이런 고난을 자청하셨습니까?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사랑하면 행복하고 즐겁고 아름다운 일이라 생각하지만, 참사랑일수록 그 사랑은 힘들고 아프고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의 연속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 사랑은 부모를 아프게 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충정은 구한말의 민영환처럼 자결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1905년에,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서 강제로 맺은 조약으로 이것을 을사조약, 혹은 을사늑약(乙巳勒約)이라고도 합니다.

민영환은 스스로의 목숨을 끊으며 일본의 부당함을 천하에 알린 것입니다.

 

5. 예수님도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셨는데, 이처럼 사람이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은 고통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조롱과 멸시를 당하신 후에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27:46) 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고통을 주는 사랑을 거부하지 않고 사랑을 베풀기를 즐거워합니까?

참 사랑은 사랑을 위해 당하는 아픔은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처럼 무엇과도 주고 바꿀 수 없는 귀하고 아름다운 열매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을 위해서 희생을 치루지 아니하고는 만들어질 수 없고, 참 사랑은 고난을 통해서 그 진가를 드러내는데, 이것은 마치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당하신 수치가 우리의 부끄러움을 없애고, 우리 대신 당하신 아픔이 우리를 죄에서 자유함을 얻게 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6. 고린도 교회는 받은 은사를 귀하게 여겼지만, 사도바울은 은사는 다 일시적인 것이요 시간이 지나면 지식도 능력도 다 힘을 잃고, 그러나 마지막까지 없어지지 않고 남는 것은 오직 하나, 그것은 사랑이고 이 사랑은 영원하다고 하였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아들의 십자가를 통해 부어주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영원하면 남녀의 사랑도 영원한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남녀의 사랑은 본능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조건 없는 영원한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절에 보면, 지금은 다 희미한 것, 즉 다 불완전한 것들뿐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다음에 보면, "그 때에는"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또 언제를 말하는 것입니까?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날에는 우리가 지금까지 사랑하고 집착하며 욕심을 내던 모든 것들은 다 소멸하고 사라질 것입니다.

오직 남는 것은 13절의 말씀처럼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 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그중에 제일 크고 위대하고 가장 아름다운 것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약간의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11:6절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였으니, 믿음을 가지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면, 그곳에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12:12절에는, "소망 중에 즐거워 하며" 라고 하였으니, 소망이 없으면 즐거움도 미래도 없으니 소망도 영원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였으니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7. 모든 은사는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교회가 온전해지면 더 이상 은사는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었고, 구원이 완성되었는데 그곳에서 무슨 믿음이 또 필요하며 소망하던 것이 다 이루어졌는데 무슨 소망이 또 필요합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것이 완벽하고 완성된 상태요 사람들이 그동안 원하던 것들이 다 이루어졌기 때문에, 더 이상 은사도 믿음도 소망도 있을 자리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녀된 자들을 위해 영원토록 남아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책망받은 이유는, 은사를 중요시하다가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행할 때, 가장 기본적이면서 가장 중요한 자세는 사랑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어떤 것도 용서할 수 있고, 어떤 허물과 부끄러움도 다 덮어버릴 수 있습니다.

8:17절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 이라 했습니다.

예수님도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3:1)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지고 나누어야 할 사랑은 세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아가페 사랑, 즉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영원한 미래를 향하여 우리를 나아가게 하며, 이 사랑이 능력도 소유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는 그런 인생이라도 영원한 구원을 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 귀한 것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더욱 힘써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고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하나님의 영원한 제일 귀한 사랑의 힘으로 세상을 이기고 내일의 영원한 승리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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